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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여 년 전, 나는 당시로서는 드물었던 남녀합반 중학교를 다녔다. 체육시간마다 여학생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걸 엿보겠다고 탈의실 창문에 남학생이 매달리는 일이 종종 있었다. 짓궂은 장난 정도로 취급되었다. 덕분에 여학생들은 신기술을 연마했다. 속살을 노출하지 않고 옷을 갈아입는 기술.

남학생은 기술, 여학생은 가정을 배웠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실습으로 남학생은 공구를 다뤘고 여학생은 바느질을 했다. 가정을 배우기 위해 교실을 옮길 때면 뭔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바느질을 싫어한 적이 없지만, 찢어진 주머니를 꿰매달라고 옷을 내민 남학생에게 화를 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응당 옷 갈아입기의 달인이 되어야 했을까. 바느질을 거절한 내 머릿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페미니즘은 물론 평등이나 불평등도 떠올리진 못했지만 부적절하다는 느낌은 있었다. 오랫동안 그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내가 느낀 것들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넘어 사회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기만 한 문제는 없었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고 당연히 부부간의 문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등은 개뿔> 책표지
 <평등은 개뿔> 책표지
ⓒ 사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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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개뿔>은 부부가 함께 만든 만화책이다. 신혜원, 이은홍 작가, 결혼 30년 차 부부가 털어놓는 솔직한 이야기들이 무척 반가웠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부부간의 문제가 결코 그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평등은 개뿔!'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부부 사이는 여전히 인권의 사각 지대이다. 모든 사람 사이에 평등과 존중은 필수다. 그래야 이 사회가 그나마 균형을 잃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자라는 세대는 기성세대로부터 배운다. 평등한 세상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레 모두가 평등하고 존중받는 사회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p207, 작가의 말)

진보적인 부모님 덕에 비교적 성평등한 환경에서 자라난 여자, 사내아이라는 혜택을 당연하게 여겨온 남자가 만나 결혼을 했다. 여자는 정의롭고 인간 평등을 실천하는 남자를 만났다 생각했고, 남자는 날 믿고 참아주고 이해하는 현모양처를 만났다 생각했으니, 동상이몽이란 말이 제격이다. 

부부 모두 출퇴근이 없는 프리랜서라서 하루 24시간을 한 집에서 일하며 생활하게 됐다. 깨가 쏟아지는 날들이 시작되었고 영원히 행복하기만 할 줄 알았지만, 장애물이 척척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바로 평등은 개뿔된 이야기. 

여자는 장인, 장모라는 호칭이 마뜩찮고 남자는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열 달 동안 뱃속에 품고 있던 아이를 낳았는데 부성주의 원칙을 따르는 법은 한순간에 여자를 소거시키는 현실. 그 앞에서 여자는 서럽지만 남자는 담담하다. 이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치열한 전쟁을 벌였지만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부부. 그들 사이에 한 가지 덕목, 평등을 추가하기로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말한다. 
 
"남자 여자 남편 아내. 그런 고정관념이 적어도 우리 사이엔 없었으면 해. 난 네가 페미니스트가 되면 좋겠어! 페미니스트는 여성을 받드는 사람이 아니라 여성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p65)

이들의 합의는 보기좋게 이뤄졌지만, 첩첩산중이다. 부부간의 평등을 이룬다고 해서 끝이 아닌 것. 성 평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남자가 평등을 위해 노력할 때는 모두에게 칭찬받지만, 여자는 드센 여자, 독한 여자, 기껏해야 '남편 잘 만난 여자'로 취급된다.
 
"여성의 인격과 능력이 무시당하고 차별받는 시대,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시대, 과연 다 지난 이야기일까?"(p108)

이제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을 주장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있지만, 그것으로 가부장제가 종식된 것은 아니다. 책은 가부장제가 옭아매고 압박하는 것이 여성만이 아님을 말한다.

남성 역시 이 체제 하에서는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 같이 배워야 한다고 책은 발랄하게 말한다. 다음 세대는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도록.
 
"남자, 여자를 떠나 모두가 평등하고 안전하게 살 방법을 찾으면 돼. 그런 걸 찾는 게 페미니즘이야. 우리 다 같이 공부하자고!"(p115)

만화로 그려진 만큼, 너무 무겁지도 않고 그렇다고 진중함을 잃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감이 참 좋다. 누구에게든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한동안 뜨겁게 느껴졌던 페미니즘 열풍이 조금은 사그러든 기분이다. 바라건대 그것이 유행처럼 지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아직 할 말이 있고 배워야 할 것 또한 무궁무진하니까.

평등은 개뿔

신혜원, 이은홍 (지은이), 사계절(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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