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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7년여간 루게릭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신정금씨가 삶의 의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쓴 에세이입니다. 신정금씨는 온몸이 굳은 상태로 눈을 움직여 글을 씁니다. 하루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편집자말]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글을 입력하고 있다.
 눈으로 모니터를 보고 글을 입력하고 있다.
ⓒ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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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부부 모임인 ME(Marriage Encounter)를 통해 17년 전 처음 만난 글라라 자매(가톨릭 세례명)는 장애인활동보조교육 이수 후 루게릭병으로 투병중인 나를 위해 매주 한두 번 방문해 나와 세상의 소통의 가교가 돼주고 있다. 난 글라라 자매가 올 때면 모아두고 미뤄둔 소통 거리들을 하나 둘 꺼내서 해결하곤 한다. 내가 관심 많은 시사 문제부터 소소한 가정사까지 자매와 (나누며) 때로는 토론도 하고 상의도 한다. 자매와 함께 있는 시간엔 신체적 한계를 잊을 때가 많다.

얼마 전 주위의 우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수 금오도로 2박 3일 여행을 다녀온 후 너무 감격스러워 내 감격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 이런 내 뜻을 자매에게 이야기 했더니 내게 <오마이뉴스>에 (글을) 실어 보는 게 어떻겠나 의견을 제시했다. 예전에도 몇 차례 자매의 권유가 있었지만 막상 내 글이 대중매체에 실릴 걸 생각하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망설였었다.

내 글에도 자신이 없고 또 이런 나를 온전히 드러낼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내 글이 오늘 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단 한 명에게라도 작은 위로와 용기가 될 수 있다면 이 또한 의미 있고 감사한 일이 아닐까 싶어 미래 언젠가로 미뤄둔 꿈을 현재진행형으로 바꿔보기로 마음 먹었다.

자가호흡만 가능하다면, 비빔밥 한 숟가락만 먹을 수 있다면, 어눌하게라도 의사 표현 가능하다면, 혼자 돌아 누울 수만 있다면... 아직도 가망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가득하고, 밀려오는 고립감과 절망감도 여전히 극복해 가는 중이지만, 그러면 그런 대로 이 또한 현재의 내 자신으로 받아들이며 사랑하며 진솔하게 글로 표현해 보고 싶다. 글을 통해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

나도 가치 있는 사회구성원이란 걸 느끼며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팔과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

2001년부터 수원 광교로 이사한 2016년 10월 29일까지 중간에 잠시 판교에 2년6개월 산 걸 빼고 아이들 초중고대학까지 보내며 내 생에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냈던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지난 6월에) 다녀왔다. 2009년 가을 판교로 이사를 해서도 동천동 집이 팔리지 않았던 탓인지 마음은 동천동에 있었다. 2012년 3월 다시 동천동으로 이사하면서 이젠 이사하지 말고 동천동에서 오래 살아야겠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 어디 마음 먹은 대로 되든가?

다시 동천동집으로 이사할 무렵부터 왼팔과 왼다리에 힘이 빠짐을 느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한의원만 다니며 침과 뜸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고 증세는 점점 심해져 갔다. 몇 군데 병원을 거쳐 큰아이 수능시험 직후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근전도 검사를 했다. 검사 도중 의사가 약간 당황해 하며 동료 의사를 불러서 "MND 아닌가"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결과 보러 갈 날짜를 잡고 집으로 돌아오며 휴대폰으로 MND가 뭔지 검색했더니 루게릭병이 MND(motor neuron disease 운동신경세포병)의 일종이란 글귀에 순간 머리가 하얗게 되고 둔기로 얻어 맞은 느낌이었다.

남편은 나를 내려주고 근무지인 원주로 떠나고 친구에게 병원에서 들은 이야기를 했더니 친구가 함께 있자며 달려와 주었다. 혹시 치료 사례가 있을까 해서 인터넷 검색을 해 치료 경험이 있다는 한의원을 찾아갔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란 이런 것인가 싶고 귀도 얇아졌다.

서울대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하자 했지만 근전도검사가 너무 고통스러웠던 터라 현대의학으론 아무런 치료방법도 없다는데 고통스러운 정밀검사를 왜 하나 싶어 정밀검사를 거절했다. 한의원 치료가 효과가 없자 점점 더 초조해지고 조급하고 불안해져서 2013년 3월엔 급기야 스스로 단식원까지 찾아갔다. 생각해 보니 무모한 짓만 골라가면서 했던것같다. 그 과정에서 돈도 많이 날렸고 안 해도 될 고생도 참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왜 그랬을까 싶고 후회되고 창피하기도 하다.

병은 점점 깊어져 최초 검사 후 불과 1년도 안 돼 한 발자국도 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스스로 숟가락질조차 할 수 없고 목소리에도 힘이 없어져 말하기도 힘들어졌다.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떠난 동네를 다시 와보니

한양대병원에서 루게릭 확진 판정을 받았다. 날 돌봐주던 친정 엄마가 아버지의 뇌경색이 심해져서 고향집으로 내려가신 뒤 낮에는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밤엔 가족들에게 의지하며 살면서부터 몸은 가속도가 붙어 더욱 나빠지기만 했다.

옛말 틀린 게 없다고,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실감나는 나날이었다. 누구보다 애처가였던 남편도 지쳐 삶의 돌파구가 필요했는지, 나와 상의도 없이 최고경영자과정에 등록해서 늦는 날이 생기더니 이듬 해엔 대학원에 등록했다. 두 아들 중 엄마에게 자칭 딸 같은 아들인 둘째도 지쳐서 종종 짜증을 내곤 했다.

안구 마우스(모니터에 뜨는 자판기에 쓰려는 철자에 눈을 맞춘 뒤 깜빡하면 글씨가 입력된다)도 쓰기 전이라 간병인과는 대화가 통하지 않아 오해가 많았다. 하느님도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고 기도조차 하기 싫어졌다.

수원으로 이사할 무렵엔 인공호흡기를 하기 직전이라 숨쉬기가 힘들어져 잠을 거의 못 자고 키 164m에 몸무게는 40kg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 당시 결핵까지 앓고 있었다.

외출은 엄두도 못 내던 때였기에 이사하던 날, 생전 다시는 못 와 볼 거란 생각에 내 생에 희로애락과 크고 작은 추억이 깃든 동네를 눈에 담아가려 유심히 바라보았다.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가자 하고 싶었지만 표현할 방법이 없었고, 무심한 남편은 지름길로 곧장 새집으로 향했다.

'어디든 하느님은 계시고 성당과 교우들도 있다'라고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살아선 못 와 볼 것 같아서 마음 속으로 내가 죽으면 동천동과 동천성당에 들러서 가달라 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이 또한 안구 마우스를 쓰기 전이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문턱이 닳도록 다니며 열심히 하는 봉사자로 살았던 동천성당, 낯익은 건물과 거리, 친구와 자주 갔던 광교산. 친자매보다 가까이 지냈던 위층 형님이 본인 집에 있다가 집정리 된 후에 이사한 집에 가라 했지만 형님을 보고 올 자신이 없어 인사도 없이 떠나왔다.

그랬던 내가 인공호흡기까지 하고 옛 동네를 다시 찾았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가깝게 지냈던 교우들과 벗들이 날 보러 와주었다. 대부분 수원집으로 가끔 날 보러 오는 이들이지만 이사 후 처음 보는 이도 있었다. 안구 마우스를 이용할 수 없으니 대화에 참여할 순 없었지만 별 불편함 없이 앉아 있었다.

다시는 못 와볼 줄 알았던 동네에 다시 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돌아오는 길이 더 이상 슬프지도 않았다. 내가 이렇게 용기 낼 수 있었던 건 날 위해 기도하고 응원해 주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좀 더 용기 내서 일상을 즐기며 살리라. 위축되지도 물러서지도 않으리라. 지금 이대로의 나를 사랑하며 이 순간에 감사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리라 오늘도 다짐해 본다.
 
 모니터의 자판기 철자에 눈을 맞춘 뒤 깜빡하면 글씨가 입력된다.
 모니터에 뜨는 자판기에 쓰려는 철자에 눈을 맞춘 뒤 깜빡하면 글씨가 입력된다. 이렇게 해서 쓴 글이다.
ⓒ 이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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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루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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