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반가운 지인이 추석 연휴를 이용해 광주를 찾아왔다. 일주일 전에 미리 성묘를 다녀왔다며, 가족과 함께 광주에서 연휴를 보낼 참이란다. 그는 단 한 해도 객지 생활을 해본 적이 없는 서울 토박이로, 얼추 10년 만에 다시 온 것이라고 했다.

그는 광주를 '예향(藝鄕)'으로 기억한다. '의향(義鄕)', '미향(味鄕)' 등 광주의 지방색을 규정하는 말들은 많지만, 하나만 고르라면 단연 '예향'이라고 말했다. '예향'이란 예술의 고장이라는 뜻으로, 과거 광주 지역의 한 신문사에서 발간한 정기간행물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다.

덧붙이자면, '의향'은 정의로운 고장이라는 의미다. 멀게는 동학농민운동과 구한말 항일의병운동의 탯자리이며, 가깝게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민주화의 성지라는 자긍심의 표현이다. 한편, '미향'은 맛의 고장이라는 뜻으로, 이곳 광주는 푸짐하고 맛깔스러운 남도 음식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의재 미술관의 모습 나무 뒤의 건물이 미술관이고, 오른쪽 단층 건물은 의재 생존 당시 농업기술학교로 쓰였던 삼애헌 건물이다.
▲ 의재 미술관의 모습 나무 뒤의 건물이 미술관이고, 오른쪽 단층 건물은 의재 생존 당시 농업기술학교로 쓰였던 삼애헌 건물이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예향'으로서, 그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곳은 무등산 자락에 자리한 '의재 미술관'이었다. 미술관 같은 집을 짓고 싶다는 바람을 이야기하며,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문화유적들이 숲속의 작은 마을처럼 정겨웠다고 기억했다. 당시 고샅길을 거닐며 언젠가 가족과 함께 다시 찾아오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의재 허백련은 19세기 대화가인 소치 허련의 정통 남종화 계보를 잇는 대표적인 한국화가다. 1949년 초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을 역임했을 정도로, 대한민국 화단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곳 광주를 '예향'이라 부르는 것도 그의 명성에 빚진 바 크다.

도심에서 무등산 입구에 이르는 도로의 이름도 그의 호를 따서 '의재로'다. 무등산은 국립공원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지질유산으로 지정된 광주의 진산이다. 해발 1187m로 산세가 험하지는 않지만, 품이 넓어 증심사와 원효사, 분청사기 가마터 등 숱한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다.

여느 곳 같으면, 산이나 절의 이름을 따서 '무등산로'나 '증심사로'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특이하게 세계지질유산으로 지정된 만큼 '유네스코로'라고 해도 무방했을 성싶다. 그런데도 굳이 그의 호를 딴 건 광주와 무등산에 남아 있는 그의 자취와 위상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말해준다.

의재 문화유적은 무등산에 오르는 등산로에 인접해 있다. 그 중심인 미술관까지는 입구에서부터 남은 거리를 표기한 안내판이 곳곳에 세워져 있어, 초행길이라도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올해는 이달 27일까지 여름철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는 현수막까지 내걸렸다.

'예향' 광주의 시민으로서 접빈객(接賓客)에 소홀할 수는 없는 법, 추석 연휴 마지막 날, 그의 가족과 함께 오랜만에 의재 미술관을 다시 찾았다. 시내버스 종점인 무등산 입구부터 등산로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하긴, 주말이면 하루에도 수천 명이 몰려, 탐방인원 수를 제한하자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알록달록 아웃도어를 입은 등산객들 사이에서 평상복 차림의 우리 일행이 도드라져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미술관에는 등산복 차림의 관람객 세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그들은 1층 카페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며 땀을 식히고 있었다.

관람료는 어른 2천원, 학생 천원. 미술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제습기 몇 대가 가쁜 숨 몰아쉬듯 돌아가고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2층 전시실에선 곰팡이 자국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미술관 입구에 배너를 세워둔 채 차와 빵을 판매한다고 홍보해 놓고선, 막상 카페 안은 여느 시골 구멍가게만도 못한 환경이었다. 미술관 풍의 인테리어까지는 기대하지 않지만, 적어도 주방과 홀의 구분과 탁자 정도는 정돈되어 있어야 하지 않나. 마치 폐업을 앞둔 가게 같았다.

그곳에서 판다는 차는 명색이 광주광역시 특산물 제1호라는 '춘설차'이고, 빵은 광주의 대표 빵이라고 광고하는 '춘설빵'이다. '춘설차'는 일교차가 큰 무등산 비탈진 곳에서 소량 재배된 차의 품종으로, 의재 허백련이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며 한시 구절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명색이 지역의 이름을 앞에 내건 상품인데, 그의 가족 앞에서 적이 민망했다.

눅눅한 전시실의 환경 탓인지 벽에 걸려 있는 의재와 후학들의 작품들 역시 수준 이하로 느껴졌다. 차마 '기획전'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만큼 작품 수도 적었고 단조로웠다. 정작 의재 본인의 작품은 산수화와 글씨를 담은 8폭 병풍 두어 점과 국화 등 화훼도 몇 점이 전부였다.

작품에 대한 소개도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그림을 보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제목과 화가의 이름, 가로 세로 크기만 눈곱만 한 크기로 스티커처럼 작품 옆에 붙여놓았을 뿐이다. 남종화는커녕 수묵화라는 이름조차 낯설어하는 관람객들에게 최소한의 작품 해설 정도는 병기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작품 외엔 그가 생전 사용했던 붓과 벼루, 몇 개의 다구뿐이었고, 흰 벽에 적혀 있는 그의 생애에 대한 소개 글만이 또렷했다. 남종화에 웬만큼 관심과 조예가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전시실 두 곳을 모두 돌아보는 데 채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적어도 그곳에서 거장의 예술적 성취를 느끼기란 결코 쉽지 않다.

혹자는 이곳의 매력은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고 한다. 의재 미술관은 2001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손꼽히는 건축물이다. 당시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는 소박하고 간결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내 광주의 대표적 현대 건축물로 자리매김 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무색해졌다. 애꿎게 세월을 탓할 수는 없다. 목재와 유리, 노출 콘크리트로 외벽을 마감한 공법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러 건물에 두루 차용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 의재 미술관을 두고 시대를 앞서 간 건물이라며 찬사를 늘어놓는 이유다.

지금 미술관 내부는 곰팡이가 슬고 건물 바깥벽에는 여기저기 거미줄이 보인다. 통유리 아래쪽엔 이끼가 피었고, 입구 안내판 위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이쯤 되면 청소나 관리가 안 된 것이 아니라 아예 인적이 끊겼다고 봐야 할 성싶다.

찾아오는 관람객이 적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관리가 제대로 안 되다 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것인지, 확언할 순 없다. 다만 분명한 건, 서울 토박이가 기억하는 과거엔 이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려 그는 세월의 더께가 입혀진 미술관이기에 기존의 세련됨에 중후함이 더해졌을 거라 내심 기대했다고 말했다.

미술관만의 문제는 아니다. 계곡 건너편 춘설헌도, 관풍대도, 의재의 묘소 주변도 잡풀만 무성한 채 사실상 버려져 있었다. 춘설차 시음장으로 지은 건물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창고로 쓰이고 있다. 계곡 위에 놓인 다리마저 곳곳이 파손되어 있어 언뜻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춘설헌과 묘소 가는 길 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는 곳곳이 파손되어 있어 위험해보이기까지 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춘설차 시음장인데, 지금은 창고로 쓰이는 듯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다.
▲ 춘설헌과 묘소 가는 길 계곡을 건너는 나무 다리는 곳곳이 파손되어 있어 위험해보이기까지 한다.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춘설차 시음장인데, 지금은 창고로 쓰이는 듯 온갖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의재가 말년을 보내 작품 활동을 했던 춘설헌은 그의 숙소이자 제자들을 가르쳤던 교실이기도 하다.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가옥으로, 크기가 서로 다른 두 건물을 이어붙인 것이다. 겉보기에는 지금 들어가 살아도 아무런 불편이 없을 만큼 새뜻하고 튼실한 모습이다.

하지만 여느 곳처럼 문은 굳게 잠겨 있고, 처마와 창문 곳곳에 거미줄만 가득해 흉물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입구에 세워진 주인 잃은 안내판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춘설헌에 견준다면, 산을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왁자지껄한 계곡 건너편은 아예 딴 세상이다.
 
춘설헌의 모습 의재가 말년에 작업을 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일본식 가옥이다. 아무도 찾지 않아서인지, 안팎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 춘설헌의 모습 의재가 말년에 작업을 하고 후학을 양성했던 일본식 가옥이다. 아무도 찾지 않아서인지, 안팎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그의 이름을 내건 유적들은 죄다 '개점 휴업' 상태이지만, 그의 묘소만큼은 위엄을 잃지 않았다. 비탈진 산 중턱에 무등산의 한 봉우리 마냥 우뚝해 울창한 숲조차 파란 하늘을 막지 못했다. 미술관과 춘설헌을 비롯한 모든 의재 문화유적들은 그의 발아래에 있는 셈이다.

의재의 묘소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10년 전의 좋은 기억을 떠올리며 부러 광주를 찾아온 그의 얼굴엔 서운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의 긴 한숨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리던 풀벌레 소리마저 잠재웠다. 이제 광주에서 의재 허백련의 이름을 떠올리기란 더 이상 쉽지 않게 돼 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의재 허백련 묘소 무등산 중턱 비탈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묘소에서 내려다본 경관이 자못 후련하다. 의재 문화유적은 모두 묘소 아래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 의재 허백련 묘소 무등산 중턱 비탈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묘소에서 내려다본 경관이 자못 후련하다. 의재 문화유적은 모두 묘소 아래쪽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 서부원

관련사진보기

 
듣자니까, 광주시립미술관에서는 '의재, 산이 되다'는 주제로 10월 20일까지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고 한다. 의재의 정신과 예술을 계승하기 위해 모인 지역 화단의 작가들이 여는 전시회다. 그의 삶과 혼이 깃든 문화유적은 폐가처럼 흉물스럽게 스러져가고 있는데, 그의 예술혼을 잇겠다는 행사의 취지가 무척이나 생뚱맞게 느껴진다.

안타깝지만, 무등산 자락 의재 문화유적에서는 더 이상 의재를 만날 수 없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죄다 이사를 떠나고 없다. 그림이든, 차든 그의 진면목을 만끽하려면 다른 곳을 수소문하는 게 낫겠다.

'의재로'도, 의재 문화유적도 껍데기만 남았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무르며 그토록 사랑했다는 무등산엔 더 이상 의재 허백련은 없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 그도 더 이상 의재를 만나기 위해 광주에 내려올 일은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광주 사는 나 역시도 그럴 것 같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오늘도 난 세계일주를 꿈꾼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인민'은 북한말이 아니다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