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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새로 펴낸 책  <서귀포를 아시나요>에는 박지현 작가의 그림이 함께 산책하듯 그려져 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이 새로 펴낸 책 <서귀포를 아시나요>에는 박지현 작가의 그림이 함께 산책하듯 그려져 있다.
ⓒ 박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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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수상한 책이다.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빛나게 까만 피부를 한 섬마을 어린 동무들이 까르르 웃으며 달려 나온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유년의 추억들이 미역줄기처럼 싱싱하게 단내를 풍기며 줄줄이 소환되어 나온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새 책 <서귀포를 아시나요>. 제목 그대로 서 이사장이 자신의 고향 서귀포 이야기를 마실 돌 듯 쓴 책이다. 그런데 마치 내가 쓴 책 같다. 그가 추억을 한 줄 불러내면 덩달아 나의 추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시장에서 단연 존재감이 가장 또렷한 인물"이었던 그녀의 어머니 현영자 여사는, 나의 어머니 '흑산도 박현단 여사'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퍼주기 좋아하고, 추잡한 꼴 못 보는 불같은 성격은 한치 어긋남이 없다.

그가 서귀포 관광극장에서 카트린 드뇌브와 오마 샤리프가 출연하는 <비우>를 감상하고 있을 때, 나는 해군들이 늙은 함정에 늙은 영사기를 싣고 와 마을 새마을 창고 담벼락에 작년 여름에도 틀었던, <성웅 이순신>이나 <전우> 류의 전쟁영화를 보고 있었다.

한 시절 영화를 누리던 서귀포 관광극장은 지붕이 반파된 채지만 살아남아 달과 별들이 함께 공연하는 특별한 야외 공연장이 되었다면, 내 유년의 극장은 언제나 별과 함께 영화가 흐르던 특별한 미디어아트 전시장이었다는 게 조금 다르다면 다를 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서귀포를 아시나요>는 서 이사장이 자신의 고향 서귀포 이야기를 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이야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의 <서귀포를 아시나요>는 서 이사장이 자신의 고향 서귀포 이야기를 쓴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이야기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 마음의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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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인사말 외에는 영어와 한국말을 못하는 호야와 크리스티나가 저녁 때마다 서귀포 이중섭거리에 있는 카페에서 낄낄거리며 무언가 대화를 나눈다는 대목에선, 나는 나의 친구 타드 태커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 사람인 타드는 한국 말을 잘하지 못한다. 나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 타드는 지금 제주도에 살고 있지만 한때 우리는 서울 광화문에 있는 직장을 함께 다녔다. 저녁만 되면 우리는 광화문에 있는 식당에 앉아 직장생활의 고충을 달랬다. 타드는 낮은 악센트의 빠른 영어로, 나는 조용하지만 특유의 억양 강렬한 전라도말로. 대화는 언어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대학 때 어학을 전공하며 음운학과 음성학을 전공필수로 이수한 나는 그때서야 제대로 깨쳤다.

그가 '서귀포판 세월호 남영호'라고 슬프게 이름 붙인 남영호 침몰 사건은, '친구 해란이'를 통해 현재 진행형이다. 내 동무들은 부모를 모두 바다에서 잃었다. 어느 동무는 용왕이 아버지를 내주지 않아 관에 아버지 대신 나무를 눕혀 장례를 치렀다. 섬마을엔 씻김굿이 끊이지 않았다. 굿은 제주도에서 '심방'이라 부르는 전라도 '당골'들이 했다.

우리 마을에도 은퇴한 당골이 살았다. 이름은 도화(桃花)였다. '복사꽃'을 이름으로 달고 살던 여자, 함께 산 사내는 굿판에서 장구를 치며 피리를 불던 이였다. 낮술에 거나하게 취해 새마을 봉초를 빨며 자신을 천대하는 섬마을 늙은 사내들을 향해 깡마른 가슴을 내보이며 "아나 젖이나 빨아라"고 호쾌하게 비웃어 버리던 멋진 여자, 도화. 유난히 그리워진다.

서귀포에서만 보인다는 별, 노인성 이야기는 흑산도에서만 보이는 것 같았던 별 남십자성을 절로 불러왔다. 섬마을 아이들에게 세상은 온통 아련한 것뿐이었다. 수평선 너머엔 남태평양의 섬 사모아 근해로 원양어선 참치 배를 타러 떠난 삼촌과 형들의 모습이 아련했다. 시선을 수평선에서 살짝 올려 하늘을 보면 별이 아련하게 반짝였다. 남십자성이었다. 저 밝고 아련한 별빛을 따라가면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 남십자성처럼 아련하게 빛나는 그리움의 끝에 아버지가 있다.

인민군 탈영병이자 포로였던, 한반도 북녘 땅끝마을 함경도 무산 사나이는 한반도 최남단 서귀포에서 얻은 딸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하지만 어린 딸은 무뚝뚝한 '함경도 아바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딸은 올레길을 내고 걸으며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서원을 세웠다. 어머니의 고향 제주도 서귀포에서 아버지의 고향 함경도 무산까지 남북을 잇는 '평화 올레'를 내겠다는.

"아버지는 지프를 타고 가실 생각이었지만 저는 아버지의 고향 무산까지 걸어서 갈 터이니, 그 길을 열 터이니 부디 그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세요."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새책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통해 어머니의 고향 제주도 서귀포에서 아버지의 고향 함경도 무산까지 남북을 잇는 ‘평화 올레’를 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공개했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새책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통해 어머니의 고향 제주도 서귀포에서 아버지의 고향 함경도 무산까지 남북을 잇는 ‘평화 올레’를 내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공개했다.
ⓒ 손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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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산양식에 유달리 집착이 컸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시도한 양식은 다시마 양식이었다. 젊은 아버지가 다시마 포자를 끼우러 가는 길에 왜 나를 데려갔는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아버지가 흑산바다에 둥둥 떠 포자를 끼우는 동안 작은 배는 잔파도에 끊임없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갯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즈음엔 나는 멀미에 지쳐 초죽음 상태가 되어 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역시 젊었던 어머니는 "너 혼자 바다에서 죽지 왜 죄없는 강아지 새끼는 바다에 데꼬 가서 산 송장을 만드냐"고 아버지를 향해 햇청 소리를 올리곤 했다. 어머니 햇청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기진맥진 잠에 들었는데 그때마다 참 편안한 꿈을 꿨던 것 같다.

아. 그나저나 보라, 얼마나 수상한 책인가. 새로 나온 책 소개를 하겠다며 쓰기 시작한 글이 결국 나의 이야기로 흘러가고 만다. 어쩌면 저자는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만의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쓰기를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만의 <광화문을 아시나요>, 자신만의 <통영을 아시나요>, 자신만의 <천리포를 아시나요>.... 나도 이제 나만의 <흑산도를 아시나요>를 쓰러 가야겠다. 흑산도를 아시나요, 남십자성을 따라 고래가 뛰놀던....

서귀포를 아시나요

서명숙 (지은이), 마음의숲(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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