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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탈 긴 직함을 가지고 살아있는 임금을 뒤에 둔 채 전권을 휘두르는 수양과 살아있는 대통령을 뒤에 두고 긴 직함으로 전권을 휘두르던 국보위상임위원장은 너무나 닮았다. 앞이 전두환 뒤가 최규하 대통령이다
▲ 찬탈 긴 직함을 가지고 살아있는 임금을 뒤에 둔 채 전권을 휘두르는 수양과 살아있는 대통령을 뒤에 두고 긴 직함으로 전권을 휘두르던 국보위상임위원장은 너무나 닮았다. 앞이 전두환 뒤가 최규하 대통령이다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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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이 8일째가 되면서 5월 25일부터 광주는 차츰 안정을 찾아가고 질서가 유지되었다. 시민들의 자치가 원활히 작동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광주시는 며칠째의 평온을 바탕으로 어느 정도 질서가 회복돼가고 있었다. 시장 과 상점들이 상당수 문을 열었고 시외곽지역으로부터 경운기에 실려 야채가 시내로 반입되고 있었으며, 고아원 및 사회복지단체 등에 대한 식량공급은 시청직원들의 지원에 의해 별다른 어려움이 발생하지 않고 있었다.

은행이나 신용금고 등 금융기관에서도 사고가 단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줄을 이어 처음엔 혈액공급이 원활치 못하던 병원은 이제 헌혈자들에 의해 피가 남아돌아가고 있었다.

도청내 시민군지도부의 3백~4백 명에 달하는 식사는 처음엔 시민들이 밥을 지어 날랐으나 항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각 동단위로 식량을 거두어 보내기도 했고, 모금된 돈으로 부식을 사오기도 했으며 어제부턴 시청당국의 협조로 비축미를 공급받고 있었다. (주석 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항쟁지도부이면서 계엄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구 전남도청 별관(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의 항쟁지도부이면서 계엄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펼쳤던 구 전남도청 별관(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김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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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이 광주를 방문한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아무리 신군부의 허수아비라 해더라도,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광주에 오면 그간의 참상을 알아보고 시민들의 말을 들어보려니, 믿었다.

최규하는 최광수 비서실장, 이희성 계엄사령관, 윤자중 공군참모총장 등을 대동하고 늦은 오후에 광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고작 한 일이라고는 전남북 계엄분소인 전교사를 찾아 소준열 전교사령관과 장형태 전남도지사로부터 허위보고를 받고 기만적인 담화를 발표한 것 뿐이었다.

담화는 "우리들의 대결상황을 북한공산집단이 악용하고자 할 것은 틀림없는 일"이므로 "일시적인 흥분과 격분에 의해서 총길을 든" 시민들은 "총기를 반환하고 집으로 돌아가 치안을 회복하는 데 협력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기만적인 담화를 이날 저녁 세 차례나 TV와 라디오를 방송했다. 시민들을 더욱 분기시켰다.
  
시신 속 아들 모습 가리키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시신들 사진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시신 속 아들 모습 가리키는 김길자씨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전남도청에서 사망한 "고등학생 시민군" 고 문재학(당시 16세, 광주상고 1)씨 어머니 김길자(80)씨가 시신들 사진 속에서 아들의 모습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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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들은 이날도 사태 수습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수습위 대변인 김성용 신부가 계엄사를 찾아가 부사령관에게 호소했다.

앞으로 우리는, 아니 도민은 네 발로 기어다녀야 한다.
어찌 사람처럼 두 발로 다닐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짐승이다.

공수부대는 우리 모두를 짐승처럼 끌고 다니면서 때리고 찌르고 쏘았다. 공수부대의 만행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또 폭도라고 왜곡된 보도를 하였으니 이 사태가 수습된다 해도 우리는 모두 폭도가 될 것이 아닌가?

우리 도민 모두가 폭도요, 새로 태어난 자식도 폭도의 후손이 될 것이다. 외지에서 누가 어디서 왔소? 하고 물으면 전남이 고향인 사람들은 무조건 폭도로 몰릴 것은 사실이 아닌가? 자, 이러한 상태 속에서 단 한 가지 길이 있을 뿐이다.

책임 있는 당국자 즉 국가의 최고원수인 최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사과하여야 한다. 보상과 복구를 하여야 한다. 보복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온 국민 앞에 천명하여야 한다.

이 길만이 무장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요. 원칙적인 해결방법이 될 것이다. 이 조건이 수습위원회의 결의요, 온 전남도민의 바람인 것이다.

우리는 피의 값을 받아야 한다. 받지 못하면 다 죽어야 한다. 그리고 수습위원회 대표가 최대통령을 직접 만나 사실을 알릴 수 있도록 계엄사 당국은 빨리 만날 수 있는 길을 주선해 달라. (5ㆍ18광주민중항쟁자료집) (주석 4)


'허수아비 최규하'는 광주의 소리를 듣지 않았고, 광주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자구책을 강구하며 미구게 닥칠 '소탕전'을 앞두고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이같은 상황에서 5월 25일 '광주시민일동'의 명의로 「광주시민 여러분께 - 23~26일까지의 시민결의」라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우리 80만 시민이 똘똘 뭉치면 분명코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후손들에게 떳떳하게 민주사회를 안겨주도록 우리 끝까지 투쟁합시다."라는 내용을 담았다.
  
 5.18민주화운동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1980.5.27
 5.18민주화운동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1980.5.27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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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시민군 일동'은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이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나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 없어서 너도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과 시민들은 과도정부의 중대 발표다. 또 자제하고 관망하라는 말을 듣고 학생들은 17일부터 학업에, 시민들은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 이럴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부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ㆍ젊은이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했으니!

아,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 부모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귀를 짤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찔리우고, 힘으로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너무나 경악스러운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표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해서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단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아닙니다! 그런데도 당국에서는 계속 허위사실을 날조유포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주석 5)


주석
3> 윤재걸, 앞의 책, 125쪽.
4> 『광주 5월항쟁사료전집』, 106쪽.
5>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2)』, 6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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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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