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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 등장했던 모델 조세핀 스크라이버
 2018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 등장했던 모델 조세핀 스크라이버
ⓒ 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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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워킹하는 여성들이, 관음증이 있는 남성들을 만족시켜주면서 주류 란제리 회사가 되었다."

위키피디아에서 미국의 유명 여성 속옷 브랜드 '빅토리아 시크릿'을 설명하는 말이다. 1977년 로이 레이먼드가 설립한 '빅토리아 시크릿'은 1995년에 시작한 속옷 패션쇼로도 유명하다.

"남성에게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 카탈로그를 구해 주면 몹시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맥심이 필요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이다. 남성성의 강고한 국제적 연대를 감안할 때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의 인기는 한국 상황만으로도 확인된다. 최근 '빅토리아 시크릿'은 23년을 진행한 속옷 패션쇼를 올해부터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선물?

"자신감 있고 당당하게 워킹하는 여성"이란 표현에는 "속옷만 입은" 혹은 "겉옷을 입지 않은"이란 설명이 빠져 있다. 그건 그렇지 치고 "관음증 있는 남성들을 만족시켜주면서" 성장했다는 말은 직관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문장 그대로는 논리적 꼬임을 발생시킨다.

기업이 성장했다면 상품을 많이 팔았다는 이야기인데, 관음증을 만족시켜준 것이 '빅토리아 시크릿' 마케팅 성공의 비밀인 셈이다. 여성 속옷이니 입는 주체는 당연히 (거의) 여성이다. 구매자도 여성일까? 한동안 '연인이나 아내에게 속옷을 선물하려는 남자들을 위한 매장'이란 개념을 내걸었으니 입는 사람과 사는 사람을 다르게 설정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

다만 분명히 할 것은, 이러한 판단은 성찰을 위한 개념화이지, 매출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실제 비중 차이를 뜻하지는 않는다. 어떨 때는 개념이 실제보다 더 실제적이다.

'이런' 개념화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본원적 소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을까. 우선 여성은 자신이 입는 속옷을 자신의 성적 혹은 미적 취향에 근거하지 않고 상대 남성의 성적 취향에 따라 결정하게 된다. 더구나 구매자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기에, 여성은 취향의 선택 뿐 아니라 실행에 있어서도 배제된다.

여성을 배제하는 이런 구도에서는 남성에게도 소외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상대의 전적(全的) 수동화 내지 대상화는 주체를 비틀거리게 만든다. 한자 '사람 인(人)'이라는 게 둘이 서로 의지하고 기대어야 성립한다고 재미삼아 말하는 그 내용 그대로이다. 이때 선물은 선물이라기보다는 언제든지 구매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된다.

속옷을 염두에 두는 관계는 대체로 사랑일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서로에게 선물인 관계가 '빅토리아 시크릿' 하나로 서로에게 (혹은 일방에게) 구매인 관계로 돌변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순도 100% 사랑이 있을까. 순도 100%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도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현실의 사랑은, 속옷에 관해서든 다른 것에 관해서든 '선물'과 '구매'가 적당하게 뒤섞여 성립하고 이어진다.

그럼에도 남성의 관음증과 구매력에 의존하는 여성의 속옷 소비가 가부장제의 구조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는 있다. 남성의 관음증을 만족시켜주며 성장했다는 사실은, 특히 관음증과 '구매'의 깊은 연관을 드러내는데, 단적으로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절절히 강조한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관음증

정확히 할 필요는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 성장의 비결이 '관음증'일까. 용어를 엄밀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논란은 있다. 일단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에는 대중적인 의미에서 관음증이 분출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성적인 몸으로 완벽한 이른 바 '빅토리아 엔젤'이 관음의 대상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사족을 달자면, 관음증이 유래한 '피핑 톰(Peeping Tom)' 사건에서 보듯 관음증은 금지된 것을, 혹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몰래 본다는 의미가 강하기에 '빅토리아 엔젤'을 관음증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다. '빅토리아 엔젤'은 패션쇼에 나선 모델이기에 말 그대로 보여준다(show). 물론 행태적인 측면에 주목해 '피핑 톰'처럼 TV나 카탈로그를 은밀하게 홀로 볼 수는 있겠지만 행태는 핵심이 아니다.

'피핑 톰'이 보는 것에 죄의식을 느끼며 고결한 인물을 훔쳐보는 것인 반면 상품화 기제에 탑재된 '빅토리아 엔젤'은, 역으로 탐과 같은 취약한 일부 남성뿐 아니라 전체 남성을 관음으로 끌어들인다. 관음은 수익성으로 연결되기에 좋은 것이다. 고디바와 같이 고결한 여인을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여인을 보는 것이기에 탐과 달리 패션쇼의 시청자나 카탈로그의 감상자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성을 매개로 '피핑 톰'이 금기와 죄의식을 논했다면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는 선정성과 수익을 추구한다.

여성의 탈대상화

개인적으로, 대상화 없는 사랑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에로스로 분류되는 성애에 기반한 인간끼리의 사랑이라면 그렇다. 그때의 사랑으로 간주되는 대상화는 상호 대상화이다. 상호 대상화라는 말은 상호 주체화란 말을 동반한다. 내가 주체로서 상대를 사랑하며 내가 기꺼이 나를 대상으로 내어놓을 수 있기에 모든 사랑이 어느 정도는 숭고하다.

어느 한쪽만이 언제나 주체이고 다른 한쪽이 언제나 대상이라면 어떻게 포장하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랑이란 용어를 쓰고 싶다면 억지로 소외된 사랑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러한 곤경에 빠지는 건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혹은 인간일 수도 있다. 다만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거의 대부분 여성이 그러한 비주체화의 곤경에 처하곤 한다.

여성의 곤경을 후기 자본주의 방식으로 물화하면 '빅토리아 시크릿'이 탄생한다. 주체로서 인간의 가능성을 모색한지 불과 몇백년에 불과한 여성은 총체적인 여성의 대상화에 맞서 다양한 경로로 탈대상화를 실천하고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 패션쇼 폐지는 '여성'에 의한 직접적인 타격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흐름 안에 위치한다. '자기 몸 긍정주의(Body Positivity)'와 관련지어도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으나 긍정적인 흐름임은 분명하다.

다만 '빅토리아 시크릿'과 무관하게 성애에 있어서 판타지는 존중되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인가. 상호대상화의 개념에 입각한 사랑이라면 관음증은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 관음증은 노출증과 쌍을 이루며 서로에게서 존중받는 쾌락의 극대치를 추구하며, 그것은 사랑의 분명한 한 양태이다.

판타지에서 속옷은,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자신의 부재를 강력하게 현현할수록 더 큰 매혹이 된다. 그 현현이 상호대상화의 맥락을 벗어나 대중(남성)의 말초신경을 자극하거나 자본의 욕구를 충족시킬 때 판타지는 본래의 매력을 상실하고 마물로 전락한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이밖에 많은 성담론과 관여된다. 이 회사의 마케팅책임자(CMO)가 "트랜스젠더나 플러스사이즈 모델은 빅토리아 시크릿이 보여주는 '판타지'의 본보기가 아니다"라고 발언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그는 결국 회사에서 잘렸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성상품화는 논란거리도 아니다. 공공연할뿐더러 노골적인 성상품화야말로 '빅토리아 시크릿'이 출범 이후 지금까지 고수한 판매전략이다. 허리가 얇고 날씬하지만 가슴과 엉덩이는 큰 백인 여성 모델, 즉 '빅토리아 엔젤'은 성상품화를 넘어 인종차별 논란을 야기하곤 했다.

'빅토리아 시크릿'은 패션쇼를 폐지하기에 앞서 트랜스젠더 모델 발렌티나 삼파이우를 자사 모델로 선발했다. 이러한 변화 움직임은 각성이라기보다는 상품화 개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빅토리아 시크릿'에다 각성이란 단어를 쓰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성의 상품화는 '빅토리아 시크릿'의 디폴트값이다. 또 '빅토리아 시크릿'만 성상품화를 꾀한 것도 아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를 숨 쉬게 하는 자본주의는 성상품화 없는 세상을 불허한다. 숨은 쉬어야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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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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