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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1년 겨울,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다. 회재 이언적(1491-1553)이다. 우재 손중돈(1463-1529)에 이어 서백당에서 태어난 두 번째 인물이다. 떠도는 얘기로, 서백당은 삼현지지(三賢之地)라 하여 세 명의 현인이 태어날 자리라는 것인데 이미 두 명은 태어났고 나머지 한 명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전기 이후 우재와 회재에 견줄만한 현인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두 인물은 뛰어나긴 한 모양이다. 회재는 10세 때, 아버지 이번(李蕃)을 여의여 요직을 두루 거친 외삼촌 우재의 손에 자랐다. 회재에게 우재는 아버지이자 스승이며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18세에 함양박씨와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었고 24세경 석귀동의 딸, 양주석씨와 연을 맺어 서자(庶子) 이전인(1516-1568)을 낳았다. 40세까지 비교적 순탄한 관료시절을 보내다 41세(1531년)에 당대의 실세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다 파직 당하고 낙향하였다.

은자(隱者)의 집, 독락당(獨樂堂)
  
계정바깥 정경 회재 이언적은 안강 자옥산 골짜기 자계 계곡에 독락당과 계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 계정바깥 정경 회재 이언적은 안강 자옥산 골짜기 자계 계곡에 독락당과 계정을 짓고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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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향하여 회재가 찾아간 곳은 박씨부인이 머물던 양동마을 무첨당이 아니었다. 자옥산 골짜기 자계(紫溪) 천변이었다. 일찍이 아버지 이번이 지어놓은 초옥을 손보고 독락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석실부인의 도움이 컸다. 정실을 버리고 소실을 택했다고 손가락질하거나 야릇한 상상을 하면 안 된다. 낙향한 처지로 은둔하기 좋은 곳을 택했다 할 것이다.

독락당이 유배형을 겨우 면한 채 낙향하여 40대에 지은 것이라면 양동마을 향단은 독락당에서 6년을 보내고 세상에 다시 나가 승승장구하다 경상관찰사로 금의환향하여 50대에 지은 집이다. 두 집 모두 회재가 설계하여 지은 집이지만 서로 성격과 모양이 달랐다.

향단이 과시적이고 화려한 집이라면 독락정은 은둔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집이다. 독락당은 솟을대문, 행랑채와 안채, 옥산정사(독락당), 계정, 어서각,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높게 솟은 솟을대문은 눈속임일 뿐 집안 곳곳에 은둔의 의지를 밝혀 놓았다. 세상과는 단절을, 자연에 대해서는 열린 공간을 구현하였다.

우선 집채를 크게 낮췄다. 기단이나 마루, 토방을 낮추고 지붕 경사를 완만하게 하여 집 모양을 납작하게 하였다. 그 다음 담으로 공간을 감추었다. 담으로 세상의 시선을 차단하고 담으로 생활공간과 자연을 구분하였다.
  
독락당 담  중문에서 독락당 쪽문 앞까지 담을 쌓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였지만 계곡(자연)쪽으로는 훤하게 뚫려 있다. 독락당은 자연에 대해서는 열려있고 세상에 대해서는 닫혀있는 공간이다.
▲ 독락당 담  중문에서 독락당 쪽문 앞까지 담을 쌓아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였지만 계곡(자연)쪽으로는 훤하게 뚫려 있다. 독락당은 자연에 대해서는 열려있고 세상에 대해서는 닫혀있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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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중문에서 독락당 직전까지 담을 쌓아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하게 차단하여 침묵과 긴장의 공간을 만들었다. 이 공간은 독락당으로 들어가기 전,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공간이다.

독락당 쪽문을 열고 들어서면 독락당(옥산정사) 안마당이다. 쪽문 방향은 독락당과 직각으로 꺾여 아직까지 독락당은 보이지 않는다. 집채를 최대한 줄이고 낮춰 넓은 마당이 더 넓게 보인다. 마당 가운데로 와야 비로소 독락당이 보인다. 감추고 감춘 결과다.
  
독락당(옥산정사) 마당 기단, 토방, 마루, 지붕 모든 게 낮다. 움츠린 집채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넓은 마당이 더 넓어 보인다.
▲ 독락당(옥산정사) 마당 기단, 토방, 마루, 지붕 모든 게 낮다. 움츠린 집채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넓은 마당이 더 넓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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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은 다시 독락당마당에서 독락당의 별당인 계정마당으로 이어진다. 이 담은 감추는 역할보다는 은둔의 공간을 자연과 구분하고 나누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집주인은 기가 막힌 생각을 하였다. 담을 째고 살창을 설치한 것이다. 살창을 통해 바람소리를 듣고 창살 틈으로 자연의 조각을 관조하였다. 세상과 단절을 고했지만 자연과는 소통하고 교류하려 한 것이다.
  
독락당 살창  자계와 독락당 마당 사이에 있는 담은 자연과 독락당을 나누는 담이다. 여기에 살창을 설치하여 자연과 교류하고 소통하려 했다.
▲ 독락당 살창  자계와 독락당 마당 사이에 있는 담은 자연과 독락당을 나누는 담이다. 여기에 살창을 설치하여 자연과 교류하고 소통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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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더듬어 들어가면 계정마당이다. 바깥세상으로부터 더 깊이 들어왔지만 자연과는 더 가까워진 공간이다. 계정(溪亭)은 마당에 지붕만 살짝 걸쳤을 뿐 몸은 계곡에 나가 있다. 회재가 관어대(觀魚臺)라 부른 계곡바위에 계정다리를 천연덕스럽게 걸쳐놓아 자연과 계정이 하나가 되었다. 독락당영역이 자연을 끌어들였다면 계정은 자연을 빌려 자연에 안긴 것이다.
 
계정 마당 양진암과 계정이 ‘ㄱ’ 자로 꺾여 있는 계정마당은 마치 스님의 수행공간인 암자 같다.
▲ 계정 마당 양진암과 계정이 ‘ㄱ’ 자로 꺾여 있는 계정마당은 마치 스님의 수행공간인 암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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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굴뚝과 아궁이

계정은 자계천으로 나와 봐야 제 맛이 난다. 관어대 바위 위에 포근히 안겨 있는 자태가 아름답다. 집주인 입장에서 보면 수더분한 암자 같고 정자 같은데 객이 되어 밖에서 보면 그럴싸한 2층 누각으로 보인다. 퇴계와 석봉은 집주인 감성으로 여기에 '양진암(養眞菴)'과 '계정(溪亭)' 글씨를 남겼다.
  
계정 굴뚝과 아궁이 계정의 굴뚝과 아궁이는 계정 바깥 벽체에 달려있다. 사람가슴 높이에 아궁이를 만들고 아궁이 오른쪽 위에 사람머리만한 구멍을 내서 굴뚝을 만들었다.
▲ 계정 굴뚝과 아궁이 계정의 굴뚝과 아궁이는 계정 바깥 벽체에 달려있다. 사람가슴 높이에 아궁이를 만들고 아궁이 오른쪽 위에 사람머리만한 구멍을 내서 굴뚝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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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도 계정굴뚝과 아궁이는 계정밖에 나와 있었다. 자신은 비록 은둔하고 있지만 은둔의 의지만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한 것인가, 계정 난간 밑 벽체에 제비집처럼 매달아 놓은 것이다. 아궁이와 굴뚝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상에 이런 굴뚝도 있구나. 굴뚝자리를 잡고 굴뚝을 만드는데 선조들의 상상력은 어디까지인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폐쇄적인 옥산서원(玉山書院)

회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승승장구하던 회재는 50중반에 접어들 즈음, 1545년 을사사화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에 휘말려 북쪽변방인 강계로 유배간 뒤 거기서 1553년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반장(返葬, 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고향으로 모셔다 장사를 지내는 것)은 유배기간 내내 옆에서 지킨 서자 이전인이 맡았다.
  
외나무다리와 세심대 옥산서원은 자계천이 잘잘 흐르고 자계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와 세심대 반석이 있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 외나무다리와 세심대 옥산서원은 자계천이 잘잘 흐르고 자계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와 세심대 반석이 있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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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 회재를 흠모하던 경주부윤(현 경주시장) 이제민과 안강고을 선비, 아들 이전인 등 민관이 합세하여 회재를 기리는 옥산서원을 세웠다. 독락당 아래 자계천이 잘잘 흐르는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았다. 회재가 이름지어준 세심대(洗心臺) 바위 옆에 있다.

삐뚤삐뚤한 역락문(亦樂門) 돌계단을 기우뚱대며 들어가자 두툼한 판벽이 가로막는다. 무변루(無邊樓) 벽체다. 아주 작은 문 하나만 열려 있다. 보통 누각이라면 개방적이지만 무변루는 다르다. 양쪽 한 칸씩 방 두개를 들여놓아 답답하고 폐쇄적으로 보인다.
  
옥산서원 역락문  삐뚤삐뚤한 역락문 돌계단은 유생들의 긴장한 마음을 달래주었을 듯하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서원에 들어서면 폐쇄적이고 절제된 분위기로 주눅이 들었을 게다.
▲ 옥산서원 역락문  삐뚤삐뚤한 역락문 돌계단은 유생들의 긴장한 마음을 달래주었을 듯하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서원에 들어서면 폐쇄적이고 절제된 분위기로 주눅이 들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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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변루  누각에 방을 들여 답답하다. 보통 누각은 밖을 향해 열려 있는데 무변루는 중정을 보고 있다.
▲ 무변루  누각에 방을 들여 답답하다. 보통 누각은 밖을 향해 열려 있는데 무변루는 중정을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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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의 얼굴인 누각이 이처럼 폐쇄적이라면 이 서원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옥산서원은 조선에서 입학하기 어렵고 원규(학칙)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서원이다. 폐쇄적이고 긴장감이 도는 이유다.

숨죽이며 무변루 밑을 지나자 '옥산서원' 편액을 달고 있는 구인당(求仁堂)과 동재와 서재로 둘러싸인 갑갑한 중정이 나타난다. 구인당마저 양쪽에 온돌방을 놓았는데 정면에 문 하나 내지 않고 벽으로 막아 버려 무변루처럼 답답하게 보인다.
  
옥산서원 정경 무변루를 지나면 강학공간으로 정면에 구인당이 있고 양옆에 기숙사인 민구재와 암수재가 있다.
▲ 옥산서원 정경 무변루를 지나면 강학공간으로 정면에 구인당이 있고 양옆에 기숙사인 민구재와 암수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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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 편액 글씨는 제주도로 유배가기 전에 추사가 쓴 글씨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힘만 가득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석봉의 '구인당' 글씨처럼 반듯한 글씨였다면 답답하여 숨이 막힐 뻔했으나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추사 글씨로 숨은 좀 돌렸다.

옥산서원의 독특한 굴뚝들

구인당 아궁이와 굴뚝은 투박한 멋이 있다. 동서 양편에 '凹'자 모양으로 아궁이 둘레에 두툼하게 벽을 쌓아 바람을 막았다. 아궁이 오른쪽 벽 하단에 조그맣게 구멍을 뚫어 굴뚝으로 사용하였다. 동쪽 굴뚝구멍은 아직 뚫려 있으나 서쪽 구멍은 막아버려 흔적만 남아 있다.
  
구인당 아궁이와 굴뚝 구인당 굴뚝은 독특하다. 아궁이 양쪽을 벽으로 막고 그 중 벽 하나에 구멍을 내서 굴뚝으로 사용했다. 오른쪽 벽 아래에 굴뚝이 있었으나 막혀있다.
▲ 구인당 아궁이와 굴뚝 구인당 굴뚝은 독특하다. 아궁이 양쪽을 벽으로 막고 그 중 벽 하나에 구멍을 내서 굴뚝으로 사용했다. 오른쪽 벽 아래에 굴뚝이 있었으나 막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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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변루 아궁이와 굴뚝 무변루에 온돌방을 들이고 난방장치로 아궁이와 굴뚝을 무변루 벽체에 만들었다. 이것으로 2층 누각의 난방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하였다.
▲ 무변루 아궁이와 굴뚝 무변루에 온돌방을 들이고 난방장치로 아궁이와 굴뚝을 무변루 벽체에 만들었다. 이것으로 2층 누각의 난방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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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대로 누각인 무변루에 온돌방을 들인 점은 독특하다. 여기에 벽체에 아궁이와 굴뚝을 설치한 점은 기발하게 보인다. 1층에만 온돌방을 들일 수 있는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2층에 있는 온돌방의 난방문제를 보기 좋게 해결한 것이다.

왼쪽은 아궁이와 굴뚝이 나란히 있고 측면에 수키와 두 개로 구멍을 낸 굴뚝이 하나 더 있다. 오른쪽은 아궁이만 정면에 만들고 측면에 위아래 구멍이 두 개인 굴뚝을 설치하였다. 독락당의 계정에서 한수 배워 만든 것은 아닌가 싶다. 창의적으로 2층 난방문제를 해결한 이런 유형의 굴뚝은 무변루와 독락당, 상주의 대산루 굴뚝 말고는 보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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