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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여 년 전 태어난 예수의 성(性)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남성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호칭에서 드러나고, 더 분명하게는 출생하고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신약성서 기록이 있다. 인간 예수가 유대인 남성이었다는 사실은 부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아니면 제 3의 성인가. 혹자는 신성모독이라고 반응할 법하다. 질문 자체를 금기시할 테지만 그래도 대답하라고 하면 하나님이 남성이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성서에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아버지인 것은 예수가 남성인 것과 마찬가지로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에 분명히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짜 아버지이고, 그렇다면 하나님은 남성일까. 남성은 생식과 관련된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재생산 혹은 번식(또는 복제?)에서 여성과 함께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경우를 남성이라고 할 때 하나님 아버지란 표현은 심각한 곤경에 처한다.

하나님이 아버지이고 그리하여 남성이라면 하나님 어머니 또한 떠올리게 되고 여성인 하나님 또한 상상하게 된다. 곤경을 우회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만일 하나님이 아버지이지만 남성이 아닌 상황은 성립 불가능할까. 현재의 다양한 성 정체성 논의에서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수 천 년 전 '하나님 아버지' 호칭에서 남성이 아닌 존재를 상정할 수 있었을까.

결국 불가피하게 예수의 아버지이자 인간이 아버지로 부르는 남성 하나님을 호출하게 된다. 남성 하나님은 앞서 상상한 대로 남성성을 전제해야 하기에 이어지는 복잡한 질문에 차례로 답해야 한다. 하나님은 남성이기에 남성에 해당하는 생식기를 구현하고 있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하나님이 몸을 가진 물리적 존재라는 뜻인가. 그때의 몸은 어떤 몸인가. 남성 하나님은 여성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가. 만일 하나님이 여성과 남성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별개의 존재인가 아니면 삼위일체처럼 각각 위격인가.

신학에서 예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둘러싸고, 또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고도 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하나님의 성을 두고 토론이 있었다는 얘기는 과문한 탓인지 들어보지 못했다. 하나님에 성을 부여하는 순간 곤란한 문제가 연이어 터져 나올 것이어서 '하나님의 성' 논의는 진행되지 않은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더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을 남성 이외의 성으로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영어에서 'man'이 남성이자 사람을 뜻하듯, 아버지는 남성이자 신성의 담지체로 자동 기술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부장제 질서에서 하나님은 가장 높고 가장 완벽한 가부장으로 비유되었을 것이고, 가부장은 당연히 아버지일 수밖에 없으므로 남성·여성을 운위한다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것은 여성이 인간의 지위를 갖지 못한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의 가족관계에 비유한다면 응당 가부장인 아버지와 가부장에 복속된 나머지 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는 게 타당하다고 받아들였으리라.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20세기에 들어서도 여성을 '제2의 성'으로 표현했으니 그간의 인류역사에서 하나님의 성에 의문을 갖지 않은 게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성서적으론 어떨까. 창세기 1장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로 돼 있다. 그 유명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것이 사람인데 그것이 남자라고 한정하지 않았다. 남자와 여자라고 명백히 두 성을 함께 표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엔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포함돼 있음을 확실히 했다.

창세기에는 두 개의 창조설화가 전하는데, 1장의 설화에서 여자와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평등하게 창조된다. 그러나 창세기 2장 설화에선 널리 알려진 대로 남자가 먼저 지음을 받고 여자가 나중에 창조된다.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창세기 2장 21)

2장의 창조설화는 이후 남성우위를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특히 성서의 권위가 절대적인 서구사회에서 더 큰 힘을 발휘했다. 다음의 신약성서 본문이 그렇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디모데 전서 2장8~15)"


기이하게도 남녀가 동시에 지음은 받은 창세기 첫 번째 설화는 무시되고 '갈비뼈' 운운한 두 번째 설화가 인용되었다. 에덴동산 일화는 두 번째 설화에 속한다. 성서에 나타난 여성차별과 혐오 문제는 여성신학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인 만큼 이 자리에선 하나님의 호칭에 집중해보자.

첫 번째 설화에서 하나님은 분명 자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짓겠다고 했다. 2장 설화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만 하지, 자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크게 의미 있는 분석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증거는 창조설화엔 없다.

예수가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부르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주장은? 그렇게 기록돼 있기는 하다. 예수를 믿으면 결국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인가. 마침내 하나님이 남성이 되는 사태를 피할 수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앞에서 거론한 문제를 다시 풀기 시작해야 하나.

성서에 기록된 예수는 어느 시대의 기독교인이든 항상 그에게 현존하는 예수이며 동시에 '역사적 예수'이기도 하다. 예수는 낮은 곳에 임해 힘없고 핍박받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셨다. 그중엔 여성이 포함된다. 예수의 수제자가 베드로가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란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 있다.

가부장제 질서에 크게 구애받지 않은 예수이지만, 역사적 예수가 당대의 관습과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설파했음은 자명하다.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을 때 그 의미는 첫 번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어버이와 자녀의 관계와 마찬가지이며, 두 번째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법적 상속자의 지위를 누린다는 것이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당시의 가부장제 질서에 조응하여 하나님은 어버이가 아니라 아버지로 지칭될 수밖에 없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어버이 중에서 여성인 어머니는 법적이고 사회적인 주체가 아니었다. 예수는 인간의 언어로 하나님을 설명한 것이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나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에 포획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란 호칭에서 아버지가 현실의 가부장제의 아버지나 생물학적 남성을 상징한다고 볼 이유는 없어 보인다. 성서나 예수의 말을 분석하지 않아도 아버지인 하나님만을 고집하는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 아버지 하나님이 종국엔 남성 하나님을 피해갈 수 없음 또한 감안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연히 아버지이자 어머니인 자애로운 어버이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은가. 만물의 창조주이자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님에게 생물학적 성을 부여한다는 것은 너무 인간적인 발상이자 난센스이다.

그러나 기독교와 교회에서 하나님의 아버지성은 강고하다. 어느 교회에서 예배시간마다 하나님 아버지에서 하나님을 빼고 '아버지'만으로 된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경악했다. 그깟 호칭에 민감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 교회가 가부장제를 수호화고 확산·증폭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나님 아버지"란 호칭은 교회 가부장제의 정점의 관행이자 담론이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아버지로 불릴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아버지란 첨언은 인간과 신의 관계를 이해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족하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이다.

다행히 우리말은 성(性)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영어의 God은 뉘앙스상으로 여성형 Goddess에 대응하는 남성형으로 인식될 소지가 크다. 독일어의 Gott 또한 남성형이다. 성구분이 뚜렷한 언어권에선 하나님이란 말 자체가 남성이거나 남성성을 시사하고 있어 하나님 다음의 아버지를 삭제해도 남성성이 잔존한다. 반면 우리말에서 아버지를 뺀 "하나님"은 완벽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는 성중립적인 느낌을 준다.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만으로 여성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분위기를 상당 부분 없앨 수 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줄여서 그저 '아버지'라고 신을 호칭하는 상황에서 하나님 이름의 정상화는 시급하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되는 날에 한국 교회는 신뢰를 회복하여 국가와 사회를 끌어가는 모범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호칭 하나가 종교와 교회를 바꾼다는 게 아니라, 그런 호칭이 사용되었음은 이미 종교와 교회가 바뀌었다는 표지이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교회를 떠난 지 오래된 하나님이 교회로 돌아올 마음을 먹게 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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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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