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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넘이를 보러, 해돋이를 보러, 다들 각자 나름의 새해맞이 의식을 치른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기가 싫다. 간밤에 늦게까지 마신 숙취도 있지만 집 근처에서 벌어지는 행사조차 춥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데'라며 애써 마음을 진정시켜 보지만 시간이 갈수록 뭔가를 해야 된다는 압박감이 슬슬 밀려온다.
 
수포대 가조6경으로 오도산에서 발원한 지산천이 흘러내리며 만든 화강암 너럭바위
▲ 수포대 가조6경으로 오도산에서 발원한 지산천이 흘러내리며 만든 화강암 너럭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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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자동차 시동을 켰다. 목적지는 거창군 가조면, 온천에서 묵은 때를 벗기고 새해를 산뜻하게 출발하자는 의미였다. 온천 이름이 '백두산 천지', 아마 평소 같았으면 촌스럽다고 피식 웃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새해맞이에는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들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로 붐빈다. 안에서 묵은 때를 박박 밀어 벗기고, 바깥 노천탕에 들어갔다 나오니 이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오후 3시 30분, 어중간한 시간이라 어디 한 군데를 들렀다 저녁을 먹기로 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니 10여리 되는 가까운 곳에 수포대가 있다. 절친한 교분을 나눴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선생이 이곳에서 만나고 5년 동안 강학을 한 곳이다. 그래서일까 도리(道里), 대학동(大學洞), 지산천(知山川), 오도산(吾道山) 등 학문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너럭바위 수 십명의 사람들이 모여도 될만큼 넉넉하다.
▲ 너럭바위 수 십명의 사람들이 모여도 될만큼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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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暄?兩先生杖?之所 坪村崔公講磨之所’(훤두양선생장구지소 평촌최공강마지소) 두 거유의 흔적을 새겼다.
▲ 각자 ‘暄?兩先生杖?之所 坪村崔公講磨之所’(훤두양선생장구지소 평촌최공강마지소) 두 거유의 흔적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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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도를 전하는 곳이라 하여 도리(道里), 대학동리(大學洞里)의 원래 지명은 홍강포(鴻江浦)였으나 두 거유(巨儒)가 이곳에서 강학을 한 이후 대학동으로 바뀌었으며, 또한 기러기 포구에 자라처럼 우뚝 솟았다는 의미의 오대산(鰲戴山)의 이름도 오도산(吾道山)이라 고쳤다고 한다.

수포대(水瀑臺)의 정확한 지명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수포대(水泡臺)라고도 한다. 수포대는 가조팔경 중 제6경으로 지산천이 흘러내리며 만든 화강암의 너럭바위다. 아래에서 보면 오른쪽에 '水瀑臺', 왼쪽에는 두 줄로 '暄蠹兩先生杖屨之所 坪村崔公講磨之所'(훤두양선생장구지소 평촌최공강마지소)라는 붉은 글씨가 석각되어 있다.

이 두 분의 우정은 워낙 유명하였으며, 연산군 초 당시 한훤당은 처가인 합천 야로에 머물고 있었는데, 함양 개평에 있던 일두와 전갈을 주고받다 합천까지 왔으니 서로 만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있어 가까운 곳이지만 당시 산길을 넘어 다니기에는 분명 만만찮은 여정이었을 것이다. 마침 중간 지점인 이곳에 한훤당의 동서가 되는 평촌(坪村) 최숙량(崔淑梁)이 살고 있어 이곳에서 두 지기(知己)는 만났다. 그리고는 무려 5년간이나 강학하며 이 지역 유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빼어난 자연풍광 속에서 향촌의 유생들을 너럭바위에 앉혀두고 한훤당은 자신의 전공인 소학을 강(講)하고, 일두는 지리산에서 깨우친 도학을 설(說)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 지역 출신 문인인 이와(螭窩) 이일협(李逸協, 1750-1808)이 지은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돌들은 잘고 잘아, 물과 돌이 어울려 흐르니 그 소리가 한훤당의 돈독함과 일두의 순수함을 모아 이룬 구슬같구나"라는 글이 나의 상상을 잘 표현했다.
 
모현정 동방오현인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두 거유와 평촌공을 기리기 위해 1898년(광무2)에 후손과 지역의 유림, 주민 등 1,000여 명이 정성을 모아 건립하였다.
▲ 모현정 동방오현인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두 거유와 평촌공을 기리기 위해 1898년(광무2)에 후손과 지역의 유림, 주민 등 1,000여 명이 정성을 모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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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에 있는 모현정(慕賢亭 : 경남문화재자료 제346호)은 두 거유와 평촌공을 기리기 위해 1898년(광무2)에 후손과 지역의 유림, 주민 등 1,000여 명이 정성을 모아 건립하였다. 정면3칸, 측면2칸의 중층누각형태로 우물마루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중앙에는 방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소박한 조선후기 건축양식이며 1987년에 중수하였다.

우리는 종종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뜻밖의 행운을 발견한다. 경자년 새해 첫날 심기일전을 위해 찾았던 온천에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한 짧은 여행이 조선 도학의 두 거유 발자취를 찾게 된 세렌디피티(serendipity)였다.

덧붙이는 글 | 제 개인 블로그 '길 위에서는 구도자가 도니다'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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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지리산 자락 경남 산청, 대한민국 힐링1번지 동의보감촌 특리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여전히 어슬픈 농부입니다. 자연과 건강 그 속에서 역사와 문화 인문정신을 배우고 알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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