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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보고할 게 있어. 일어나면 전화해줘." 일어나 보니 해외에 있는 딸애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었다. 또 뭔 사살을 늘어놓으려나 했다. 어려서부터 말이 과하다 싶게 많아, '저 녀석은 입도 안 아픈가' 싶을 때가 종종 있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작금에 이르러선 꽤 눅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과묵하달 수는 없는, 천성이 다변인 그런 아이다.

오늘도 늘 그렇듯이, 자신의 일상을 세상의 유일무이한 사건으로 화하게 하는 설을 풀려나 했다. 그런데 영상통화 화면에 등장한 이 녀석의 몰골이 심상치 않았다. 눈이 퀭하고 핏기가 없는 게 영락없는 환자 꼴이었다. 아뿔싸.

얼마 전부터 체한 듯 구토가 오고 쓰린 듯하다가 이내 괜찮아지곤 한다고 했다. 병원을 가라는 내 당부를 알았다고 하고는 떼먹은 게 화근이었다. 괜찮겠지 했을 터다. 낙관과 달리 증세는 악화됐고, 그날 저녁 급기야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다행히 홈스테이 호스트가 급히 병원으로 데려갔고, 의사 지시에 따라 입원 조치 되었다. 위궤양과 위염 진단을 받고 치료받느라 아무것도 못 먹은 채, 나흘을 혼자 그 낯선 곳에 있었다니.

망할 와이파이가 잘 터지질 않는 바람에 연락을 못하다 퇴원해서야 전화를 걸어온 딸애를 보니 짠했다. 아픔보다 외로움이 더 사무쳤을 터. 위가 탈이 났으니 속을 잘 달래 줘야 할 텐데... 잘 쉬고 몸보신을 좀 해야 할 텐데... 한약을 먹으면 좋을 텐데... 마침내 그놈의 궤양은 왜 걸린 거야 까지, 남편과 나는 딸애의 퇴원 소식에 뒷북을 치며 걱정을 늘어놓았다.

걱정이래야 마트에 달려가 각종 죽과 국 그리고 일품요리 즉석 밥을 잔뜩 사서 부치는 것 외, 달리 방도도 없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딸애는 우리를 담담히 안심시켰다. 정말 괜찮다고. 이제는 아프지 않다고. 아무 걱정 하지 말라고. 이 아이, 어느새 확 커 버렸지 않은가.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 멀리 있는 딸애의 안부를 묻길래 이 소식을 전했다. 다들 한 걱정이었다. 지인 중엔 자녀가 해외에 직장 생활하며 살고 있거나 학업 중이기도 하다. 다들 부자는 아니어서 자녀들이 자력으로 이렇게 저렇게 방법을 찾아 떠난 출정이어서, 이렇다 할 재정적 뒷받침은 못하는 형편들이다. 먼 곳에 자녀를 두고 있다 보니 이심전심인 면이 있었는데, 그날의 반응은 평소와 달리 싸늘했다.

"애가 그렇게 아프면(지금은 안 아프다) 엄마가 가봤어야지 그냥 두냐. 무슨 엄마가 그래"가 주된 분위기였다. 지금 발병을 했다면 모를까, 이미 퇴원했고 회복했다고 하자, 더 거센 질타를 받았다. "뭘 해줘서가 아니라 같이 있어주는 거죠." 애가 학교 갔다 돌아오면 한 저녁인데, 서너 시간의 저녁 시간을 같이 있어주기 위해 그 먼 길을 갔어야 한다는 게 요지였다.

항공료 부담도 무시할 수 없고, 장시간 비행은 늙어가는 몸을 녹초가 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삼사일은 침을 맞고 나서야 움직여지는 이 부실한 허리를 혹사하며 그 먼 여정을 미션처럼 수행했어야 했나.

앞서 딸애의 상태가 걱정이 되어 홈스테이 호스트에게 메일을 보냈다. 보내온 답장엔, 이젠 회복했고 상태가 심각한 게 아니니, 먹는 것만 조심하고 약 잘 먹으면 곧 호전된다는 의사의 전언과 함께, 심각한 상태가 아니니 걱정 말라는 위로를 보내왔다. 좋은 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믿음이 갔고 정말 고마웠다. 안심하라기에 안심한 내가 지나치게 무심한 걸까. 그 먼 곳을 날아가 딸애의 옆을 지켰어야 좋은 엄마였던 걸까.

'당신은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농담을 가장한 질타를 딸애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가끔 받아왔다. 초등 입학 전에 아이를 혼자 놀이터에 내보냈다고, '생각 없는 엄마'라는 뒷 담화를 들었다. 초등 2학년 때는 방과 후 활동을 하게 된 딸애를 활동 장소까지 혼자 오가게 했다고, '무모한 엄마'라는 비난을 받았다.

오히려 딸애는 약간 긴장했지만 잘 다녀와서는, 초등생으로서는 결코 짧지 않은 여행을 수행한 자신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는데 말이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 바짝 성적 올릴 궁리를 내지 않는다고, '무능한 엄마'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캠프를 지방으로 보낼 때도 딸애를 동반해 본 적이 없다. 미리 교통 편과 동선을 잘 파악하고, 캠프 교사가 딸애를 어디에서 몇 시에 픽업할 것인지만 정확히 매칭하면, 복잡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딸애는 가까운 곳인데 걸어가긴 멀고 차편이 애매할 때, 내 자가용을 얻어 탈 궁리를 내긴 했지만, 차라리 먼 길은 으레 혼자 가려니 했다. 먼 길을 단지 자신을 운반할 요량으로 자가용을 운전해 데려오고 가고 하는 서비스를 자신의 엄마는 제공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나는 야박했던 엄마일까?

17살 아이가 단독으로 비행해 공부할 곳으로 갔다고 했을 때, 듣고 있던 지인들의 경악한 표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17살 아이는 외국을 혼자 갈 수 없는 것인가? 되려, 이미 국제공항을 가봤으니 배짱 두둑하게 혼자 가겠다던 딸애는, 나의 비 동반을 당연히 여겼는데 말이다.

딸애는 혼자 씩씩히 떠났다. 무사히 도착했으나 비행기 연착과 지체된 입국심사로 갈아타야 하는 로컬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멘붕'이 오긴 했지만, 이 난국 역시 해결했고 아무도 반기는 이는 없지만 목적지에 안착했다. 17살 딸을 믿었던 나는 말도 안 되는 엄마일까?

낯선 곳에 혼자 지내며 속이 편하기만 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무슨 바람이 딸애를 그 먼 곳으로 떠나게 불어댔을까. 부는 바람에 홀연히 떠났지만, 정주하는 삶이 바람처럼 유연하고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떠나기 전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누리고 살았는지를 절감한 딸애는, 그 깨달음을 잠이 쉬 오지 않는 밤에 나직이 읊조리곤 했다.

그곳은 이곳과 달리 어린 동양인 여자애를 특별히 대하는 곳이 아니다. '특별히' 차별할 수는 있는 곳이지만. '근자감'으로 무장됐던 아직 어린 내면은 어느새, 드러나지 않는 차별과, 고향의 음식을 먹어도 사라지지 않는 고독으로 조금씩 야위어갔을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자신의 존재를 딸애는 타국에서 마주했을 것이다. 이 극한의 감정은 이주민 인권과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페미니즘까지 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지만, 어떤 연고도 없는 타국에서 부모의 조력 없이 살아가는 일이, 창호지처럼 쉽게 뚫리는 보호망을 두르고 광야에 서있는 듯한 극단의 고립감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애는 지금 아플 수밖에 없다. 위가 탈이 나고 생리가 불순하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곧 있을 겨울 방학에 항공료 걱정 말고 들어와 쉬고 가라는 했을 때, 딸애는 깊은 고민 없이 거절했다. 들어가면 떠나기 더 힘들 것이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아 시간도 여의치 않다며. 이렇게 애쓰며 커가며 '자기 앞의 생'을 직면하고 있는 딸애를 응원하고 위무하는 일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먼 길을 마다않고 쫓아가 옆에서 머리를 쓰다쓰담하고 따끈한 세 끼를 대령해야 하는 걸까? 이것이 엄마다움일까. 그렇지 않다면, 모성이라 불릴 수 없는 걸까.

자식이 제 멋에 떠난 노정이라고 해서 부모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부모에게 떠난 자식은 자리를 옮긴 것일 뿐, 일상에 무시로 끼어든다. 그 애가 좋아하는 음식 냄새를 맡을 때, 책 속에서 그 애 또래의 맹랑한 아이가 등장할 때, 영화관 옆자리가 허전할 때, 좋은 풍경을 보며 슬퍼질 때, 딸애는 부모의 촉수를 건드린다. 때론 간지럽게, 때론 격하게, 때론 쓸쓸하게... 딸애도 비슷할 것이다.

딸애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고 있고, 부모는 이렇게 부모가 되어가고 있다. 서로 떨어져 있는 거리가 서로를 멀리 볼 수 있게 해주자, 오히려 먼 거리는 마음의 간극을 좁혀 주었다. 그럼 다시 만날 땐 '퍼펙트'한 부모 자식 관계가 되어 있을까. 물론 아닐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조금'이지만, '서로가 우선이 되는 삶'을 마중물 하기에 넉넉하다.

영화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에서 엄마 파비안느는 배우 커리어를 완벽히 해내기 위해 엄마를 등한시했다. 둘 다 잘 해내기 불가능하기에, 배우를 선택한 셈이다. 보통은 엄마를 선택하고, 그로 인해 사랑, 헌신, 지극한 모성이라고 칭송받지만, 자신의 삶은 빈 껍데기로 남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최고의 배우가 되려는 파비안느의 야망은 좋은 엄마 되기보다 값진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걸까? 만일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아빠를 접은 남자라면, 비난받았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남자에게 야망은 호기롭게 나아갈 대륙이고, 여자에게 야망은 그나마도 진입이 어려운 변방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엄마 노릇까지 넘본다는 이 시대에, 왜 우리는 아직도 '엄마 됨'을 정형화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엄마가 좋은 엄마이고 나쁜 엄마란 말인가? 또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자식의 성취로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이유를 대신하던 유구한 모성은 그리 오래지 않아 박제된 유물로 박물관에서 만나게 될지 모른다. 과연 어떤 엄마가 인류로서 살아남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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