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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보다 성당이 더 많다는 로마에 오면 맨 먼저 바티칸을 찾는 게 순리다. 전 국민의 97%가 가톨릭 신자인 나라에서 로마를 넘어 이탈리아의 중심은 단연 바티칸이다. 영토로만 보면 도시 속 작은 도시국가일 뿐이지만, 명실공히 교황이 거주하는 전 세계 가톨릭의 총 본산이다.

이탈리아에서 한 달 살기를 시작하며 주인에게 인사드리러 가는 마음으로 첫 날부터 서둘렀다. 떠나기 전 인터넷을 통해 오전 방문 일정으로 입장권을 예약했고, 아침 식사도 거른 채 바티칸을 향했다. 숙소를 나서기 전, 거울 앞에서 옷차림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바티칸은 신자가 아닌 단순 관광객들조차 옷깃을 여미는 성지다. 무슬림들이 평생 적어도 한 번은 메카를 순례하듯, 가톨릭 신자에게 바티칸은 메카와도 같은 곳이다. 성 베드로 성당 안에 모셔진 피에타 상 앞에 서면 순간 누구라도 회개하고 가톨릭 신자가 된다는 말도 있다.

교황은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다. 정치 지도자들마다 찾아가 만나기를 바라고, 무슬림과 불교도, 심지어 무신론자조차 교황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인다. 교황의 모습을 보기 위해 일요일마다 성 베드로 광장을 가득 메운 이들 모두가 가톨릭 신자는 아닐 테다.

삼엄한 경비 속 바티칸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 입구 이른 아침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높은 성채처럼 보이는 벽이 로마와 바티칸의 국경이다.
▲ 바티칸 박물관 입구 이른 아침부터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높은 성채처럼 보이는 벽이 로마와 바티칸의 국경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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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에서 바티칸에 '입국'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입장권을 끊고 바티칸 박물관에 찾아가는 것과 로마 도심을 향해 트인 성 베드로 광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현재 두 경로는 연결이 되어 있지 않아, 두 곳 모두 보려면 박물관을 관람한 뒤 다시 '국경'을 넘어 '재입국'해야 한다.

바티칸의 중심은 성 베드로 성당과 광장일 테지만, 그것만으로 바티칸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바티칸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숱한 보물들이 죄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 베드로 성당은 무료인 데 반해, 박물관 입장료가 만만치 않은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박물관 입구는 이른 아침부터 인산인해다. 지하철 역 근처에서부터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로 북적이고, 아직 입구까지는 멀었는데도 입장권을 예약했는지를 사전 확인하는 직원까지 줄을 섰다. 삼엄한 경비 속 박물관은 바티칸의 출입국 관리소고, 입장권은 여권인 셈이다.

입장권을 예약할 때는 방문 시간을 정하게 되어 있지만, 막상 와서 보니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매표소든, 무인 발권기든 출력한 바우처만 있으면 즉시 입장권으로 교환되었다. 깃발을 따라 움직이는 단체 관광객들과 개별 여행자들이 엉키면서 입구는 순간 아수라장이 됐다.

사실 방문객들에게 시간 예약을 요구하는 것은 관람 인원을 제한하고 적절히 분산시키기 위한 취지다.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몰리게 되면 관람에 방해가 되는 건 물론이고, 유물 관리의 어려움과 안전사고의 위험까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엄숙해야 할 종교적 성지임에랴.

박물관에는 조토와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카라바조, 미켈란젤로, 로댕 등 이름만 들어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거장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본다고 해도 한나절이 꼬박 걸릴 만큼 작품 수도 많고 규모도 크다. 오디오 가이드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으며 관람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관람을 방해하는 건 정작 작품의 양과 규모가 아니다. 바로 이곳을 찾는 어마어마한 관람객의 숫자다. 전문가들이 제대로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굳이 박물관을 찾을 게 아니라, 시중에 판매되는 도록을 이용하는 것이 낫다고 조언할 정도로 관람 환경이 좋지 않다.

관람객들이 서로 작품을 가리는 건 다반사고, 카메라 셔터 소리와 단체 관광객을 인솔하는 가이드의 설명이 곳곳에서 메아리 되어 전시실을 가득 메운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모습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감상'은 없고, '구경'만 있다고나 할까.

값비싼 입장료에 견줘, 관람객을 위한 박물관의 배려도 기대에 못 미친다. 무엇보다 전시실이 너무 어둡고, 설치된 조명도 각도가 맞지 않아 되레 관람을 방해하기 일쑤다. 애초 건물 자체가 박물관 용도로 설계된 것이 아닌 탓이라지만, 핑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모름지기 걸작이란, 작가와 작품의 수준 못지않게 그것이 어느 곳에 전시되어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열악한 전시 공간에 방치되어 있다면,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그 예술적 가치를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 교과서 속 삽화를 확인하는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라파엘로의 방 '아테네 학당'이 전시된 라파엘로의 방은 늘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더욱이 차분히 작품을 감상하는 건 애초 불가능하다.
▲ 라파엘로의 방 "아테네 학당"이 전시된 라파엘로의 방은 늘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더욱이 차분히 작품을 감상하는 건 애초 불가능하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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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람객들이 이 먼 곳까지 와서 작품을 가슴에 담지 못하고, 무작정 카메라 셔터만 눌러대는 풍경은 박물관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인파에 휩쓸려 한 시간만 따라가다 보면 이곳이 바티칸이라는 인식이 깨끗이 사라지고 만다. 차마 성지라고 우러르기에는 적이 민망한 모습이다.

그런데도 박물관에서는 신자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관람객에게 경건함을 요구한다. 당장 맨살이 드러난 민소매나 짧은 치마를 입고서는 박물관에 입장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맨발에 샌들 차림도 안 된다. 성지 순례를 위한 최소한의 드레스 코드를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의 '핫스폿'인 시스티나 소성당에서는 조용히 하라는 안내 방송이 수시로 나온다. 다른 이들의 차분한 관람을 방해하지 말라는 취지라기보다 엄숙해야 할 성당 안이니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는 뜻일 게다. 하지만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북적이는 공간에서, 엄숙해지길 바라는 건 연목구어 아닐까.

종교적 경건함은 정결함과 고요함에서 오는 법이다. 사람들이야 전시실 건물 밖에도 넘쳐나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게 또 있다. 바닥 여기저기에 담배꽁초와 1회용 컵, 빨대 등이 발에 치인다. 숫제 야외 매점 주변은 더는 수습이 불가능하다는 듯 온갖 쓰레기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다.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고 쓰레기를 버리는 관람객들의 그릇된 태도만 탓해서는 곤란할 성싶다. 드레스 코드까지 명문화한 내로라하는 종교적 성지라면, 무엇보다 관람객 수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조처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유명무실한 예약제를 제대로 운영하고, 성지 순례가 단순한 관광으로 치부되지 않도록 기념품점과 매점 등 편의시설의 관리도 필요하다.

성 베드로 성당에도 많은 인파가
 
바티칸을 지키고 있는 스위스 용병 성 베드로 성당 입구는 중세 전통 복장을 입은 스위스 용병이 지키고 서 있다. 명색이 바티칸을 지키는 병사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 바티칸을 지키고 있는 스위스 용병 성 베드로 성당 입구는 중세 전통 복장을 입은 스위스 용병이 지키고 서 있다. 명색이 바티칸을 지키는 병사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재미있는 구경거리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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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나와 늦은 점심을 먹은 뒤 성 베드로 광장을 향했다. 오후 늦은 시간인데도 아침 박물관보다 몇 배는 더 긴 줄이 섰다.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공항의 검색대처럼 소지품 검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기도 하지만, 다비드 상과 함께 미켈란젤로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피에타 상이 자리하고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이곳은 성당이라기보다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깝다. 요란한 카메라 셔터 소리에 부활절이나 성탄절 때 전 세계로 생중계되는 미사가 열리는 곳이라는 사실조차도 잠시 잊게 된다.

바티칸에서 시작한 이탈리아 여행은 종교도, 문화도, 예술도 아닌 수많은 관광객들과의 부대낌으로부터 시작됐다. 솔직히 비수기인 겨울철이라 내심 여유로운 시간이 되리라 기대했는데 착각이었다. 첫 날 반나절 동안 바티칸에서 만난 우리나라 관광객만 해도 족히 100명은 넘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로마에서 이틀을 보낸 뒤 줄곧 작은 도시를 찾아 떠날 계획이다. 이왕이면 뜨내기 관광객이 적고, 현지 주민의 삶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욕심을 낸다면, 바티칸처럼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이탈리아의 과거와 오늘을 비교해볼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면 더 바랄 게 없겠다.

흔히 로마나 피렌체, 베네치아만 떠올리지만, 이탈리아에는 여전히 감춰진 보석 같은 도시가 많이 남아 있으리라 믿는다. 명색이 서양 문명이 시작된 나라인데, 발길 닿는 곳 어디든 만만치 않은 내공이 숨어 있을 게 틀림없다. 여태껏 여행을 준비할 때마다 무슨 수학 공식인 양 외우듯 했던 여행 안내책자를 부러 읽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누구 말마따나, 노를 놓치고서야 비로소 바다를 볼 수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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